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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6. 22:50 - Meiyo

[켄히나] 해, 그리고 해바라기.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의 노을진 시간, 켄마는 마치 첩보영화의 요원이라도 된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합숙을 맞이하여 평소보다 더욱 잔소리를 퍼붓는 쿠로오를 피해 연습을 도망 나온 참이었다. 엄마보다도 더 심하게 잔소리를 해대는 쿠로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켄마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털어낸다. 어차피 걸리면 잔소리 배로 들을 것도 각오하고 나왔으니 지금은 스스로 손에 넣은 자유를 누려야지. 켄마는 체육관 뒤 쪽의 후미진 곳에 있는 창고 벽에 기대어 앉아 주머니에 넣어뒀던 비타를 꺼냈다. 그렇지 않아도 기대하고 있던 신작게임이 나왔는데 쿠로오의 눈초리에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던 차였던지라 비타를 켜는 켄마의 얼굴이 여느 때보다 들떠 있어 보였다. 시작을 위해 O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켄마의 머리 위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켄마, 찾았다!"


화들짝 놀란 켄마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들자 뿌듯한 표정으로 힛, 하고 웃고 있는 히나타가 서 있었다. 다행이야, 쿠로가 아니라서. 켄마는 자기도 모르게 쿠로오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하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켄마의 마음을 알 리 없는 히나타는 켄마의 옆에 찰싹 붙어앉아 비타를 쳐다본다.


"게임?"

"...응. 부탁이니까 쿠로한테 말하지 말아줘, 쇼요,"


히나타라면 이런 걸 쪼르르 달려가서 남에게 말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켄마는 현행범으로 걸렸으니 도둑이 제 발 저린 건 당연한 처사였다. 그런 켄마의 말에 히나타는 고민하는 듯 제 미간을 꾸욱 눌러대며 인상을 찌푸리더니 다시 장난스럽게 힛, 하고 웃었다.


"그럼 토스 올려줘!"


역시나.. 

히나타의 두 눈 가득 토스, 토스! 하고 외치는 게 켄마는 잘못 걸렸다 싶었지만 물은 이미 엎어졌다. 결국,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 대답에 히나타는 누구보다 기쁜 듯이 두 손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고 만세를 외쳤다. 그 모습에 켄마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미소 지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히나타는 정말 햇살 그 자체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정말 햇빛에 녹아버린 것 처럼 당연스럽게 제 안에 들어와 있었다. 켄마는 거의 제 어깨에 기댈 듯이 머리를 대고 비타 화면을 쳐다보고 있는 히나타를 내려다봤다. 노을과도 같은 머리칼이 두서없이 사방팔방으로 뻗쳐 있는 것조차 귀엽다고 느껴졌다. 이대로 정수리에 입 맞추면 어떻게 될까. 해보지도 못할 자신이라는 걸 잘 알기에 켄마는 쓴웃음을 짓고는 비타에 눈을 돌리려는데 히나타가 위를 올려다보면서 시선을 마주쳤다. 당연히 들릴 리 없었겠지만, 일순간 들렸나 싶어서 켄마는 가슴이 철컹했다. 최대한 당황한 표정을 숨기며 비타로 시선을 돌렸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비타를 쥐고 있는 켄마의 손에 땀이 배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심장이 터질 거야. 여전히 히나타의 시선은 켄마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계속해서 닿아오는 그 시선에 켄마는 눈을 꽉 감아버렸다.


"뭔가 생각날 것도 같은데.. 으음."

"....?"


정적을 깨고 나온 히나타의 말은 당연하겠지만, 전혀 예상 외의 것이어서 켄마는 감았던 눈을 뜨고 히나타를 마주봤다. 역시나 도둑이 제 발 저렸기에 다시 시선을 떨궜지만. 개미가 기어가다 못해 죽어가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켄마가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

"그게 켄마머리를 볼 때마다 뭐가 자꾸 생각난단 말이야."


히나타가 쳐다 본 것이 켄마 자신을 본게 아니라 켄마의 머리카락을 본 것 뿐이었다. 당연히 마음의 소리가 들릴 리 없는 것이었는데. 새삼 자신의 바보같았던 수 분전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켄마는 고개를 푹 떨궜다.  


"푸딩.. 아닐까, 그런 말들 자주 해."


어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으로 절박한 켄마는 제 나름대로의 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히나타는 붕붕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 더 예쁜거란 말이야. 예,예쁜.. 마음 같아선 히나타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지만 오늘은 지은 죄가 있어서 차마 히나타에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켄마는 그저 히나타가 얼른 생각해내거나 생각을 포기하고 체육관으로 돌아가주길 바라며 애써 비타에 집중했다. 한참을 옆에서 끙끙거리던 히나타가 알았다! 하고 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켄마 역시 비타에서 시선을 떼고 히나타를 바라봤다.


"해바라기! 해바라기였어, 켄마!"


그건 꽃, 아닌가. 켄마가 뭐라고 반박을 말하기도 전에 히나타의 손이 켄마의 머리에 와 닿았다.


"해바라기는 잎은 노랗고 안은 까맣잖아. 딱 켄마랑 닮았어!"


그걸 생각해낸 자신이 매우 기특하고 자랑스러운지 뿌듯하게 웃어보이는 히나타에게 켄마는 차마 반박 할 수가 없었다. 리에프나 쿠로가 그랬다면 가차없이 쳐냈을텐데. 자신은 정말이지 히나타에게 너무 약했다. 머리에서 떨어져나가는 히나타의 손에 작은 아쉬움을 느끼며 켄마는 조금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꽃이잖아, 쇼요. 남자에게 꽃은 좀 그렇지.."

"그치마-안 딱이잖아! 이제 해바라기쨩이라고 부를까?"

"뭐? 쇼,쇼요!"


히나타의 장난에 당황한 켄마가 팔을 뻗어 히나타를 잡으려고 하자 히나타는 날쎄게 그 손을 피하고는 체육관 쪽으로 도망갔다. 어정쩡한 포즈로 석상마냥 굳어버린 켄마를 향해 양 손을 크게 흔들어보이며 해바라지쨩, 이따 토스 올려줘야 돼! 하고는 놀려댄다. 노을진 석양을 등지고 하하하 하고 웃고 있는 히나타의 모양새가 그 뒤에 있는 해와 꼭 닮았다. 

해를 닮은 너, 그런 너를 바라보는 나. 그리고 나와 닮은 해바라기.

분명 히나타는 아무 의미 없이 그저 자신의 머리색을 보고 말한 거겠지만 켄마는 꼭 들어맞는 상황에 제 마음을 들킨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또다시,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

(2015.02.28) 히나른 전력에 썼던 글. 주제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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