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소설 등에서 흔히 타인의 마음이나 기억을 읽는 것을 로맨틱하고 환상적인 것처럼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타인의 기억 따위, 생각 따위가 로맨틱할 리가 전혀 없는데 인간은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것에 대한 환상이 너무 깊다.
켄마는 타들어 가는 담배 끝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봤다. 새빨간 불이 소리 없이 빠르게 담배를 태워갔다. 그 모습이 마치 능력에 좀 먹어 타들어 가는 제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계속 타버리다 어느새 정신 차리면 아무도 쓸모로 하지 않는 잿가루밖에 남지 않겠지만 그렇게 되면 적어도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자유'. 켄마는 달콤하면서도 꿈 같은 그 단어를 차마 입 밖으로는 내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혀끝에서만 굴려보았다. 그것은 언제 나와 같이 씁쓸한 뒷맛을 남기며 사라졌다. 켄마는 입안을 껄끄러이 맴도는 씁쓸함에 미간을 찌푸리며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마지막 연기가 공중으로 흩어져 사라지는 것까지 바라보고는 안 주머니에 넣어둔 가죽장갑을 꺼내어 꼈다. 손에 달라붙듯 감싼 가죽장갑 특유의 서늘한 촉감에 손을 두어 번 쥐었다 폈다. 그 날 이후로 한시도 손에서 장갑을 떨어트린 적이 없었다. 이제는 맨손이 어색할 정도였다. 구겨 넣듯 양손을 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었다. 뒤돌아 멀어지는 켄마의 뒷모습을 따라 길게 이어진 숨이 흩어졌다.
이번 목표는 한 남자였다. 제 밥그릇 챙기기 급급한 정치꾼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국민의 권리를 위해 나라를 위해 활동한 정치가였다고 했다. 지금 그는 모든 정계 활동을 은퇴한 뒤 한적한 변두리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추문에 휩싸인 적이 없는 청렴한 이미지 덕분에 은퇴한 지금까지도 국민과 수많은 언론에서 회자 되고 있었다. 덕분에 현 정권의 기득권층들은 초조하고 불해했다. 고고한 그에게 계속해서 비교되고 폄하되었다. 기득권층은 눈에 불을 켜고 그의 추문을 잡기 위해 전전긍긍했지만 한창 정계에 있을 때도 털지 못했던 그의 추문을 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켄마는 카페 테이블에 앉아 제 손에 들린 서류들을 힐끗 쳐다봤다. 서류에는 은퇴한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담겨 있었다. 깨끗했다. 삶에 염세적인 켄마가 봤을 때도 이렇게 청렴하고 소박한 정치가라니 하고 놀랄 정도였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그를 끌어내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를 끌어내리기에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기득권층은 켄마를 찾아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치부까지 찾아내는 명견. Spurhund, 수색견. 그것은 뒷세계에서 켄마를 부를 때 쓰는 말이었다. 그 어떠한 사람이라도 수색견을 피할 수 없다. 마치 도시 전설과도 같았다. 그들은 켄마에게 그의 치부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때마침 거액의 돈이 필요했던 켄마는 그 의뢰를 받아들였지만 조금 찝찝해졌다. 설마 이렇게까지 청렴한 사람이 존재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기 때문이었다. 팔랑팔랑 서류를 넘기던 켄마의 시야에 그가 들어왔다. 서류에 적힌 것처럼 오후 2시가 되자 책을 들고 카페에 들어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창가의 자리에 앉았다. 켄마는 그가 마시고 있는 커피를 바라보았다. 저것만 손에 넣으면 된다. 그러면 일은 끝날 것이고 그는 내일 자 신문의 머리기사를 장식할 것이다. 입맛이 썼다. 켄마는 신경질적인 손놀림으로 커피잔을 내려놨다.
깡, 유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카페 안에 울려퍼지며 순식간에 켄마를 향해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 되었다. 생각보다 크게 울린 소리에 켄마 본인도 당황했는데 설상가상으로 목표물과 시선이 마주치는 바람에 더욱 당황해서는 몸을 뒤로 물리다 커피잔을 쓰러트렸다. 가죽장갑 위로 쏟아진 터라 뜨겁지는 않았지만 제 바보 같은 행동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켄마는 고개를 푹 숙이고 테이블 위에 놓인 티슈를 집어 들고 장갑 위를 닦아냈다. 이런 찝찝한 일은 두 번 다시 안 받아야겠어. 켄마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커피를 닦던 켄마는 손목 쪽까지 축축해진 것을 깨달았다. 커피가 타고 흘러 안쪽까지 적신 모양이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되도록이면 장갑을 벗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선은 한 쪽만 벗어 안감 부분을 닦는 것에 집중하는데 켄마의 곁을 누군가가 스쳐 지나갔다. 따뜻하면서도 포근한 냄새가 났다. 자신도 모르게 장갑을 닦고 있던 손놀림을 멈출 만큼 그 냄새는 켄마에게 굉장히 강렬했다.
번뜩 고개를 들어 뒤를 쳐다봤지만 냄새의 주인은 이미 사라지고 흔들리는 문에 따라 청량한 방울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따라가야 한다. 왜인지 이유는 켄마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몸이, 가슴이 반응했다. 그 일이 있기 전,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 떠오르던 따뜻한 품, 포근한 냄새. 그것과 닮았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켄마는 바닥에 떨어진 작은 동전 지갑을 발견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쓰는 것 같은 못생긴 고양이가 그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떨어트리고 간 걸까. 켄마는 주저 없이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으로 동전 지갑을 주웠다.
이제 그 사람의 기억을 읽으면... 읽,히지가 않아?
켄마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아직 장갑을 끼고 있던 손마저 장갑을 벗고 양손으로 동전 지갑을 감싸 쥐었다. 읽히지 않았다. 물건은 깨끗했다. 외견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물건 속에 담긴 기억이 전무했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새 제품이라 할지라도 공정 과정이라던가 유통 과정을 통해서 이런저런 기억이 담기게 되는데 이 동전 지갑은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마치 표백제에 담갔다 뺀 것처럼 새하앴다. 그 날 이후로 저주와도 같은 능력이 생기고 처음이었다, 보통 사람처럼 맨손으로 접촉하고도 아무런 기억을 읽지 못한 것이. 켄마의 척추를 타고 전율과도 같은 소름이 흘렀다.
혹시나 싶어 테이블 위에 있던 장식용 꽃병에 손을 댔다. 그와 함께 머릿속에 한편의 파노라마처럼 기억들이 펼쳐졌다. 순식간에 많은 양의 기억들이 들어와 지끈거리는 두통을 털어내듯 고개를 흔들면서도 켄마의 입꼬리는 좀처럼 내려올 줄을 몰랐다. 손바닥 안쪽에 촉촉이 땀이 배었다. 그를 찾아야 한다. 자유는 얻을 수 없을지라도 안정은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 옛날 불타 사라졌던 라이너스의 담요가 다시 제 인생에 찾아왔다. 무심하고 고요해 보이는 눈동자 안쪽으로 들뜬 안광이 비췄다 사라졌다.
그 날을 기점으로 켄마는 그를 찾는 것에 몰두했다. 그가 카페에 있었던 시간에는 혹시나 다시 올까 싶어 카페에 죽치고 앉아 기다렸고 그 외에는 주변을 돌아다니며 그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매일 같이 카페에 간 덕분에 목표물이었던 표적과는 어색하게나마 눈인사까지 나누는 애매한 사이가 되었다. 의뢰자들은 언제쯤이면 일 처리가 되는 거냐고 빽빽 소리를 질러댔지만 지금 켄마에게 중요한 것은 라이너스의 담요를 찾는 것이지 그들의 밥그릇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내가 노리는 게 당신들이 될 거라며 협박 아닌 협박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후.
켄마의 한숨이 겨울의 찬바람과 만나 하얀 김을 피우며 공기 중으로 흩날렸다. 벌써 열흘 정도가 흘렀다. 그동안 이 작은 도시를 제법 샅샅이 뒤졌지만, 그의 모습은 머리털 한 올 보이지 않았다. 마치 장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켄마에게 있어 사람을 찾는 것은 숨 쉬는 것 처럼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어째서인지 이유는 모르지만 켄마는 그의 기억을 읽을 수 없었다. 덕분에 그를 찾는 일은 굉장히 어려웠다. 하지만 켄마는 그럴수록 웃음이 나왔다. 그로 인해 평범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다시는 이런 기분을 느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오늘은 제법 멀리까지 나온 것 같았다. 벌써 오후 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지금쯤 가면 그가 카페에 와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투둑, 툭 하고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리고는 이내 솨아아 하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소나기가 쏟아졌다. 켄마는 머리카락부터 젖어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혹시나 그가 지금 카페에 와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지금 카페를 나가려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생각이, 생각이,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전신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힘겹게 카페를 향해서 뛰어가는데 누군가 켄마의 손목을 붙잡혔다. 직접 닿지는 않았지만, 사람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켄마로서는 화들짝 놀라며 잡힌 팔을 뿌리쳤다. 쏟아지는 소나기로 시야가 흐릿했지만, 태양이 보였다.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물줄기로 흐려진 시야가 맑아졌다. 그리고 더는 비가 떨어지지 않았다. 시선을 올려본 켄마의 머리 위에는 투명한 비늘 우산이 씌워져 있었다. 켄마가 다시 시선을 내려 자신을 붙잡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아까 봤다고 생각한 태양은 이 사람의 머리칼이었나 보라고 주홍빛으로 예쁘게 물든 머리칼을 바라보며 켄마는 생각했다.
"괜찮아요?"
걱정스러운 시선과 마주쳤다. 분명 다른 사람이었다면 주제넘은 짓이라며 무시했겠지만 묘한 기분이었다. 괜히 가슴 한구석이 흐물흐물하게 녹아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자신 쪽으로 기울인 우산 탓에 어깨 끝이 젖어가는 걸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다.
켄마는 이 사람이 그 라고 확신했다. 소나기로 인해 물 내음만 가득했지만 우산 속은 따뜻하고 포근한 냄새가 가득했다.
가슴이 뻐근했다. 숨이 가빠오는 것도 같았다. 켄마는 장갑을 벗고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뺨에 가져다 댔다. 손끝에 따뜻한 뺨의 온기가 닿았다. 차갑게 식은 켄마의 손끝을 타고 온기가 느릿하게 퍼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차게 식은 몸이 손가락부터 따뜻해져 갔다.
"아니, 저기?"
켄마는 잔뜩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그대로 꽉 끌어안았다. 품 안에 가득 들어찬 몸이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어? 어? 하면서 바둥거리는 몸을 더욱 깊이 끌어안으며 켄마가 입을 열었다.
"...이름, 알려줘."
"아, 히나타 쇼요! 가 아니고 누구세요?"
쇼요, 히나타 쇼요.
켄마는 머릿속으로 수십 번 그의, 히나타의 이름을 되뇌었다.
"코즈메, 켄마."
저기 코즈메씨? 이것 좀 일단 놔주실래요. 켄마는 연신 품에서 벗어나려 바동거리는 히나타를 놔주었다. 히나타는 숨이 찼는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푸하!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무례한 상황에 좀 뿔이 났는지 뾰로통한 얼굴로 켄마를 쏘아보는 것조차 도 귀여웠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안고 있어도 닿고 있어도 평범한 사람처럼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켄마는 다시 찾아온 라이너스의 담요를 보며 생애 처음 환하게 웃어 보였다.
찾았다. 나의 안식, 나의 요람.
+
(2015.05.14) 인생 첫 합작인데 얘도 앞뒤로 쓰고 싶은 내용이 너무 많았지만 다 쳐냈... (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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